codecademy 에 다시 찾아가서 ruby 를 배우는 중인데 (오늘은 일찍 출근해서 세션 두개 해치움) 역시 예전처럼 loop 만 보면 당황한다. 이전에 한별이랑 프로세싱쪽을 할 때도 loop 에서 헤맸던 걸 생각해보면 재능이 없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언어를 배우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나 편하려고) 뭘 구축해야하는 상황이다보니 좀 더 이유는 절실해진다. 빠이띵! 
(캡처한 이유는 디자인이 많이 이뻐져서)  

codecademy 에 다시 찾아가서 ruby 를 배우는 중인데 (오늘은 일찍 출근해서 세션 두개 해치움) 역시 예전처럼 loop 만 보면 당황한다. 이전에 한별이랑 프로세싱쪽을 할 때도 loop 에서 헤맸던 걸 생각해보면 재능이 없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언어를 배우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나 편하려고) 뭘 구축해야하는 상황이다보니 좀 더 이유는 절실해진다. 빠이띵! 

(캡처한 이유는 디자인이 많이 이뻐져서)  

La belle et la b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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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e et la bête

미녀와 야수의 배경은 프랑스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제작된 이번 2014년 버전이 꼭 보고 싶어서 평일에도 예매를 시도 했다가 경기도권은 막차시간이 정말 심하게 빠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평일에 보기를 포기했었다. 벼르고 벼르다 일요일 오전에 일찍 나서서 야탑 CGV 를 갔다. 지하에 영화관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지만 (대부분 내가 가보았던 영화관들을 높으면 높았지 지하는 처음이다.) 인테리어가 CGV라서 외려 안심이 되었다. 무비꼴라주를 자주 보다보니 서울에 있을 때도 압구정 CGV, 신촌 아트레온 등은 자주 갔어서 ‘그저 CJ에서 제작한 인테리어지만’ 고향같은 느낌이었다. 신비의 힘에 둘러싸인 성을 묘사하는 음향과 비주얼 나와서 iTunes 에서 즉각 음반부터 구매했다. 정식발매되면 DVD도 살 기세이다. 프랑스어를 워낙 (못 알아먹어도) 좋아하다보니 아마 스토리가 아무리 읭? 스러워도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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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내 레아 세이두에 혹해서 보았다. 분명히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는 그냥 흔한 프랑스 사람처럼 큰 매력 못느끼고 있었는데 여기선 예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 사람이 나온 다른 영화도 찾아봐야지.

나른한 5월의 마지막 날이다. 지금은 2014년인데 잠시 졸린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공간이 떠올랐다. 2년 전 유럽을 갔을 때, 독일 어딘가의 길에서 나는 이상고온현상같은 더운 봄을 보내며 걸음을 올기고 있었다. 그 때는 하루하루가 밝고 맑았으며 햇살에 나를 내놓고도 싫어하지 않았다. 폴더를 뒤져 사진을 찾았다. 

2012. Bamberg, GermanyiPhone4S 

나른한 5월의 마지막 날이다. 지금은 2014년인데 잠시 졸린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공간이 떠올랐다. 2년 전 유럽을 갔을 때, 독일 어딘가의 길에서 나는 이상고온현상같은 더운 봄을 보내며 걸음을 올기고 있었다. 그 때는 하루하루가 밝고 맑았으며 햇살에 나를 내놓고도 싫어하지 않았다. 폴더를 뒤져 사진을 찾았다. 

2012. Bamberg, Germany
iPhone4S 

Error mulu

지금 맡은 롤이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하다보니 사용자리뷰를 인도네시아어(인니어)로 보는데 누가봐도 앞에는 ‘에러’라고 하는데 정확히 인도네시아어 사전에는 mulu 라는 말이 없다. 약어이거나 오타이거나 할텐데 외국인에게 오타로 된 남의 나라말은 정말 패닉으로 이어진다. (이 문장에서 외국인은 나) 

일단 mulu가 약어라고 가정하고 찾아보았다. MULU는 Miss You Love You 의 약어라고 한다. 혹시 몰라서 ‘미슈러뷰’같은 의미의 아이콘을 죄다 뒤져서 전송해보았다. 당연히 그거 하나만 전송에러가 뜰 리가 없다. CS 혹은 리뷰를 남길 정도라면 설마 이게 자기들끼리 ‘Miss you Love you’ 텍스트 메시지를 보내는데 에러가 났겠어(?) 싶지만 또 보내보았다. 굉장히 잘 간다. 

혹시 몰라서 위키피디아를 뒤졌다. 90년대 브리티시 트립합밴드, 중국 운남성의 지배자, 말레이시아 공항, 말레이시아의 산, 에티오피아 지명, 이란의 지명, 소셜공유웹사이트 라고 나온다. 굳이 가정을 해서 말레이시아 지명이라고 치자면 특정 지역에서 메시지가 가지 않는다는 말이라고 해도 그건 말이 안되고. 소셜공유웹사이트 mulu에서 보낸 메시지라고 하기엔 그게 또 이상하다. 그 서비스는 텍사스에서 시작된 서비스이고 웹사이트와의 연동이랑은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사용자가 말한 mulu는 철자를 누락한 것일 수 있다. 인니어 사전을 뒤지면 

  1. muluk 높은, 어마어마한, 왕들 
  2. mulut 구강, 입구, 액체를 넣는 구멍
  3. mulus 순수한, 깨끗한, 잡것이 섞이지 않은
  4. mulur 늘어나는, 탄력있는, 탄성의 

이걸 메시지들이랑 결합을 하면 몇 가지 케이스로 좁혀지는데, 인도네시아 문법을 알 수는 없지만 2번만 명사이고 1,3,4는 형용사이다. 사용자가 1번을 말하려 했다면 엄청난 규모라고 짐작할 수 있지만 사전적 의미 자체가 ‘높은’ 의미의 ‘어마어마함’이라서 메시징앱과는 무관한 의미다. 2번을 의도했다고 하자면 결국 보이스메시지인데 이 기능은 이 플랫폼에서는 제공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애초에 에러가 발생할 수 없다. 3번이라고 치자면 말 그대로 ‘원활한’ ‘잘 동작되는’ 인데 이 뜻이라면 잘 안 되었어요. 이기때문에 일반적인 네트워크 에러일 가능성이 크다. 4번이라고 가정해보자면 메시지가 길어지는 문제인데 긴 메시지를 체크해고 있다. 

내가 모르는 외국어로 된 CS 는 진짜 굉장히 어렵다. 아침 내내  mulu에 집착하고 있어. 

사실 다른 리뷰까지 교차해서 보다보면 mulu는 어쩌면 그냥 well, 혹은 잘 … 이런 의미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내가 내 글에 댓글 기능을 지원하지 않으니… @pixstory 역시 우렁각시같은 우리 사수님 ㅠㅠㅠ) mulu = all the time 이랍니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포스팅으로 2012년 초에 Foursquare UI 변화에 대해서 썼었는데 이번에는 Swarm 이 나왔다.

주변 사람을은 ‘아직도 Foursquare를 써요?’ 라는 반응을 보인다. 네 아직까지 써요. 여행에 특화된 앱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행동반경을 이렇게 잘 (그리고 오랫동안) 누적해두었던 앱이 없기 때문에 일단은 쓰고 있어요. 특히나 이동의 자유가 있던 대학생 때와는 달리 대부분의 루트가 집-회사인 회사인 생활을 하다보니 어느 순간 이동의 범위가 확대되었을 때 느끼는 쾌감이 좋아서 여행을 가면 스팟단위로 족족 기록을 남겨놓으려고 찍고 다니는데, 그러다보니 여전히 포스퀘어를 쓰고 있다.

나의 현재 위치를 저장하는 아주 단순한 액션에서 시작한 포스퀘어는 맨 처음에 다가왔던 느낌은 ‘땅따먹기 게임’이었다.

1) 나 여기 가봤다. 에서 확대되서 2) 여긴 내가 주인이다

이렇게 확장되는 걸 보다보면 초반부터 나왔던 Badge, Mayor 시스템은 이 앱의 부흥에 커다란 역할을 했었다. 심지어는 Gamification의 좋은 예로 들어졌는데, 여전히 가장 정확하고 성공적인 예이지 않나 싶다. (물론 이걸 오독하면 배지만 주면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건 좀 그렇지만.) 

하지만 서비스의 확대는 그리 녹록하지 않았나보다. 주변에서 쓰는 사람들이 줄기 시작했고 (특히나 페이스북이 체크인을 집어넣으면서 정말로 친구들에게 자랑하려면 애들이 자꾸 페북에서 체크인으로 자랑질을 한다.) 메이어를 경쟁하는 것도 사람들이 줄기 시작하니 치열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재밌는 것도 하다보면 질린다. 새로운 재밌는 것을 하지 않으면 이제 슬슬 싫증을 낼 수 있다는 것도 동의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초반에는 관계에 초점을 맞춰 나와 친구의 액티비티를 하나씩 뜯어서 배치를 했고 좋아요(하트)를 누를 수 있게 열었다. 그리고 개별 액션에 대해 코멘트를 달게 했다. 이미 페이스북 피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비슷한 경험을 제공했었다. 

그리고 쿠폰 정도로 제휴했던 방식이 개별 기업체들이 사용자처럼 스팟과 포스팅을 올리는 방식으로 변했다. (예를들면 루프트한자) 기업체들이 운영하는 계정은 ‘페이지’라는 이름으로 작동되고 이들은 일반사용자와 달리 팔로우 개념을 가져왔다. (사용자들끼리는 승인요청-수락의 관계로 작동된다. 실제 신체가 위치하는 지역을 노출하다보니 그 스팟을 노출하는 데 있어서 보다 엄격한 친구관계를 제시한다.)  

이 때쯤 서비스 전체의 축은 피드에 있었다. 친구들과 페이지의 활동들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주변 탐색과 추천, 그리고 그걸 내 저장목록에 담기가 주축이 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요 시기에 표시된 ‘근처’라는 부분이 탐색이다. 내가 위치한 물리적 위치를 중심으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이런 곳이 있다는 추천을 해주게 된다. 그런데 또 이 추천은 앞 단계의 친구들의 액티비티를 기반으로 추천이 된다. 물론 추천의 기준은 비단 친구뿐 아니라 절대적인 전체 사용자의 많은 방문도 영향을 준다.  

어떻게 보면 그 때 그 때 유행들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 같기도 했다. 소셜, 큐레이션 과 같은 홍보하기 좋은 아젠다를 그대로 따라간 것 같기도 하지만 방향을 생각해보면 또 그렇게 매우 잘 못된 건 아니다. 하지만 자꾸 자꾸 기능이 확대되고 확장되다 보니가 자꾸 자꾸 초반 핵심 기능이었던 Check-in 액션 자체는 축소되어간다. 버튼의 위치는 중앙아래쪽에 있다가 네비바에 올라갔다가 이제는 탭하면 다른 앱(Swarm)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이제는 또 두 집 살림을 한다. Swarm 과 Foursquare 라는데

Swarm
- 체크인액션
- 친구의 활동내역

Foursquare 
- 개별 스팟에 대한 상세 정보
- 주변 지역 추천 등 

사실 Swarm 앱의 완성도는 좋고 (사실 포스퀘어도 잘만들긴했… 팬이에요.) 썸네일을 뚱뚱한 육각형으로 한 것도 신기하고 한글폰트를 시원시원하게 뽑았고 (디자이너들이 한글은 답이 없다고 하는 걸 무시할 정도) 상큼한 주황색이고, 스왐이라는 브랜드도 포스퀘어 배지에서 나온 거니까 (사람이 몰리는 데 가면 주는 배지 이름) 굉장히 센스있고 좋은데.. 

앱의 핵심기능을 생소한 이름의 앱으로 분리해서 출시했을 때 이걸 어떻게 홍보해서 띄우고 어떻게 성공시킬지가 궁금하다. 본(元) 앱이 기능이 커졌을 때 메인(本) 기능을 따로 빼서 앱을 만들면 어떻게 되는 걸까? 

파편화 라는 단어 자체가 애초에 디자인을 유연하게 했으면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될 문제이지않을까. 종종 듣는 이야기는 이렇게 하면 디자인 완성도가 떨어져요, 라는 말인데. 예술작품이 아니라 사용자가 사용하는 게 최우선이다보니 환경제약에도 잘 적응할 수 있어야하는 게 맞는 것 같고 모두 그 방향을 원하는 거 아닐까. 아무튼 어려워. 

읽다와 쓰다는 결국 동전 앞뒷면처럼 붙어있는데 그 성격이 묘하게 다른 상황. 그리고 어찌되었든 오래 쥐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습관의 형성’이 큰 변수로 작용하는데 그게 또 현재는 과도기적 상태는 아닌가 싶음.

일단은 쓰다보다 읽다가 쉬운 액션인 것은 맞고, 그건 ‘기기가 불편해서야’ 라는 이유보다 더 큰 건.. 원래 쓰는 사람보다 읽는 사람이 더 많은 게 정상. 생각해보면 읽다:쓰다 비율을 1:1로 요구했던 건 아닌가 싶다.

어떻게 하면 쓸 것인가, 가 왜 희대의 고민이 되버린걸까.

소개팅 나가기 전에 그 사람의 페북 / 싸이를 확인하는 것과 이음으로 보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1) 작정하고 쓴 글과 자연스럽게 쓴 글 / 그런데 대부분 다들 보통 작정하고 잘 못 쓰더라. 작정하고 쓰더라도 주어진 시간이 매우 짧다.
2) 글로 고르는 것과 / 이미 골라진 사람을 염탐하는 앞뒤 차이.
3) 미니멈 맥스멈이 있음 / 리밋없음 - 하지만 운영상의 이유로 미니멈이 있는 것. / 부실한 프로필은 자연도태되면 안되려나?
4) 사실은 글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 

기획자란 직업에 대한 이해

졸업은 했지만 매번 삶의 전환점마다 찾아뵈야할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백수기간동안 와서 특강 한번 할래?’ 라는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가, 학부 애들에게 무슨 말을 하지? 라는 생각이 들어서 뒤죽박죽한 생각의 흐름을 그냥 정리를 해보았다. 말은 중언부언 정신없게 나왔지만, 아무래도 평상시에 하던 이야기들이라 그나마 좀 나았다. 학부생일때 그것도 정보문화학 학생일때 뭘 생각했었고 뭘 더 신경썼으면 더 좋았을까를 고민해서 정리했었다. 

기획자란 직업에 대한 이해 

아마도 누군가는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생각을 해보았을텐데, 사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니까. 

타인의 불행에 대한 책임

주기마다 재앙이 떨어졌었다. 백화점이 무너진 적도 있고 지하철이 화염에 휩싸인 적도 있고 이 번에는 배가 바다에 침몰했다. 시대의 상흔처럼 남아있는 각각의 사건들은 사회구조적 문제를 건드렸지만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그 상처가 유독 한 집단안에서 집중되어있다. 견딜 수 있을까, 그 무게감과 지독한 속앓이를 누가, 얼마나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과열된 언론과 프로패간다로 끌고 가고 싶은 정치인들은 무엇을 알고 행동하는 걸까. 감정이 없고 공감을 못한다면 결국 자신이 맡은 역할놀이를 하고 있는 것일까. 온전히 타인인 것은 맞지만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면, 그 자리에 앉은 이유로 명예와 돈을 쥐고 있다면 최소한의 공감능력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대가로 가지고 있어야하지 않을까. 생각은 여전히 복잡하다. 의도적으로 어떠한 가치판단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많은 것을 상실한 이들만큼 괴롭지 못하고 함께 분노하지 못하기에 쉽게 말을 뗄 수가 없다. 어쩌면 일상에 대한 생각조차 쉽게 결론짓지 못하겠다.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우연한 불행이 나를 빗겨간 것에 감사하되 충분히 깊게 안타까워하자. 그저 막연히 괜찮았으면 좋겠다. 이 아픔을 겪고도 살아남은 이들은 그 고통을 버텨내고 살아야하니까. 

간주관적이 객관적이지만은 않다

오랜만에 만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예전의 나보다 훨씬 무뎌진 나를 발견한다. 대학교 때 동아리활동을 할 때는 상당히 원리원칙주의자였고, 인정보다는 이성에 기반을 두었고 되도록 모든 이들이 공평하게 일을 분담했으면 했다. 물론 그러한 이상적인 상황은 불가능하기에 ‘가능한 만큼 열심히는 해보자’ 주의였다면, 지금은 오히려 기준이 나이브해진 편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 재단하는 것에 대해 꽤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어디에든 불평이 생긴다. 내 마음에 들지 않아 상대를 비난하기도 하고 그 상대에 대한 단점을 찾게 된다. 혹은 그것을 안쓰럽게 보며 혀를 차게 되는데, 그런데 그 행동은 정말 끝도 없고 누구 한 명이 사라지기 전까지 지속된다. 더 독특한 것은 설령 그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그의 단점을 다른 이에게서 찾아내게 된다. 어쩌면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일 수도 있다

사실 사적인 공간에서 다른 이의 글을 발견했다. 그 글은 그 사람이 누군가를 힐난하는 글이었다. 무책임하고 대충하며 쉽게 회피한다 글이었는데, 가장 놀라운 건 내가 보았던 그 사람의 모습이 정확히 그랬는데 그 사람은 그걸 핑계로 다른 이를 비난하더라. 어쩌면 그 비난받던 사람 역시 글쓴 사람처럼 ‘오늘은 몸이 좋지 않아서’ ‘열심히 할 기분이 아니라서’ ‘이건 내 인생에 그리 중요하지 않아서’ 라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수 있다. 그런데도 닮은 사람을 그렇게 매정하게 비난하는데, 아 어쩌면 나 역시도 내가 남을 비난할 때 찝어놓았던 흠들을 그대로 실행하고 있을 수 있겠다 싶었다. 혹은 반대로 이미 내 흠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에 그렇게 잣대를 들이댄 것일수도 있다. 결국엔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말로 날을 세워 나를 지키려했을 수 있다. 이성적이고 똑똑한 척 비난해봤자 소용없다. 남일이 아니니까. 딱 너도 그러니까.  

자신의 기준을 세워놓고 타인이 따라오길 바라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 행동인가, 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그렇게 행동을 했던 적이 있다. 잔인함의 정도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상대는 내 기준을 모르고 상대는 내가 그를 평가하는 지도 모르고 상대는 그 기준과 무관한 행동을 했을 수 있고 상대는 애초에 그 기준과 현저히 다른 능력치를 가졌을 수 있다. 필요에 의한 평가라면 피치못하게 상대평가를 해야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들의 성장은 그가 가진 능력치 안에서의 최선을 다하는 것에 의의를 둬야하지 않나 싶다. 결국에 결론이 같고 결과물이 같다면 일단 서로 열심히 했다는 것 정도만 인정해도 스트레스는 덜 받지 않을까. 

남에게 기준을 주고 그걸 달성하지 못한다고 내가 분노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속을 파곤드는 것에 불과한다. 어쩌면 그건 상대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상황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누군가 스트레스를 받고 그 이후에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감내할 가치가 있는 피로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결국 그 분노는 자신의 속을 파고들 뿐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 

어느 순간, 이런 피로에 대한 동의를 다른 이들에게 구하기 위해 말을 꺼낸다. 상대가 동조하기만을 바라고 보지만 어쩌면 듣고 있는 사람은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두 사람이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고 그게 객관에 가깝다는 착각을 하지는 말자. 학문의 관점에서는 객관으로 가는 길일 수 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상대가 그저 동조하는 척을 할 수도’ 있고 ‘이해관계에 의해 그렇다고 인정할 수도’ 있다.  그 동의는 그 집단안에서의 진실이지 실제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지. 그래야 덜 힘들고 행복하고 편안할 수 있다. 자신이 아름답고 옳고 바르다고 믿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진짜라고 맹신하지 말자.

너의 어리광에 귀찮아서 혹은 너의 억지에 지쳐서 맞춰주는 것일 수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네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일 수 있으니.